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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여행: 쿠스코 태양신전(코리칸차)과 요새(삭사이와만)를 가다.

남미 여행/페루

by Travel Memories of GG Couple 2023. 7. 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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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7
쿠스코와 인근의 유적지를 방문하는 투어에 참가했다. 현지 가이드가 영어로 안내했다. 처음 간 곳은 아르마스 광장 부근에 있는 Tupac Amaru 문화 회관이었다. 쿠스코 전통 장인들의 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곳이었다.

쿠스코 장인들의 공간이 이어져 있었다. 그동안 시내에서 보았던 물건보다 훨씬 정교했다. 카톨릭 국가답게 예수님 탄생 장면을 재현한 것도 있었다. 천사의 모습이나 마리아와 요셉의 옷차림이 새롭다. 페루화된 것 같다. 

장인별로 자신의 부스를 차려 놓았다. 

어떤 장인은 전통 복장을 입고 있었다. 

문화회관을 나와서 12각형 돌을 보러 갔다. 가는 도중에 특색있는 기념품 가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 곳은 색색의 구두를 판매하는 곳이다. 색상이 화려하고 디자인이 정교했다. 

12각형 돌이 있는 로레토길이다. 잉카의 성벽 위에 스페인식 집을 지었다. 벽에는 여러 각형의 돌들이 서로 맞춰서 쌓여 있었다. 듣던대로 작은 틈도 없이 정확하게 맞물려 있다. 돌과돌을 접착시키는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단한 축조술이다. 큰 지진이 일어나도 잉카 성벽은 잘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성벽이 있는 골목길 건너편 벽은 모두 특산물을 판매하는 가게였다. 종교와 관련된 장식품을 파는 곳도 있었다. 

쿠스코 시내의 길이다. 잉카 성벽이나 그 돌을 기단으로 흰 벽으로 된 스페인풍 집이 늘어서 있다. 베란다가 있는 집도 있다. 좁은 도로는 암석으로 만들었다.

특산품 가게를 둘러보는 것도 좋은 볼거리였다. 점심 시간이 되어 괜찮은 레스토랑을 찾았다. 

콜로니얼 스타일 건물이다. 내정까지 꽃과 야외용 테이블로 잘 꾸며져 있었다. 

시설과 음식이 모두 훌륭했다.

쿠스코 성당 관람을 위해서 아르마스 광장으로 이동했다. 잉카 기념 분수 앞에는 원주민 복장을 사람들과 관광객이 섞여 있다. 뒤에 보이는 산비탈에는 허름한 집들이 많았다. 관광객들은 전통 복장을 입은 원주민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광장 바로 옆에 있는 쿠스코 대성당을 관람하였다. 세개의 성당이 이어져 있었다. 먼저 왼편에 있는 성가정(사르라다 파밀리아) 성당으로 들어가서, 가운데에 있는 바실리카 성당을 거쳐서 우측의 승리의 성당으로 나오도록 되어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입구이다. 맨 위에 양쪽에는 종탑이 있고, 가운데 부분에 예수님을 포함한 성가정과 좌측에 성요셉, 우측에 성모 마리아 상이 보였다. 바실리카 성당의 내부 제단은 황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성모 마리아 상은 치마 모양이 산 모양과 같았다. 이 곳의 토속 신앙인 대지의 여신을 반영한 모습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해 주었다.   

성당 관람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잉카 신전인 코리칸차로 이동했다. 가는 도중에 발굴과 복원 중인 유적지를 만났다. '쿠시칸차'라고 한다. 토착민의 언어인 케츄아 어로 행복한 곳이라는 뜻이다. 이 곳도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서 파괴되고 그 위에 콜로니얼 건물이 세워졌다. 건너 편에 수도원 종탑과 스페인식 건물이 보였다. 원래 이 지역은 잉카의 귀족과 성직자의 거주지였으며, 코리칸차 신전에 필요한 물건을 보관하거나 방문객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행복한 곳답게 라마도 보였다. 

조금 더 이동하니 종탑이 나왔다. 수도회 성당이다.  

콘벤토 데 산토 도밍고를 방문했다. 쿠스코에 있는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원이다.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은 잉카 제국의 가장 중요한 신전인 코리칸차를 부수고, 그 석재를 사용하여 1610년에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1650년 쿠스코 지진으로 심하게 손상되었고 그 후 복구되었다.  

수도원 내부의 정원이다. 아치형 아케이드가 조화롭다. 

아케이드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문은 짙은 회색의 돌로 만들었는데, 코리칸차의 돌을 이용한 것 같다. 벽은 황색으로 칠해져 있고 큰 성화들이 줄지어 걸려있었다.

수도회 내부에는 코리칸차 박물관이 있었다. 신전의 원형 모습이 남아있다. 고대 잉카의 태양신을 섬기기 위한 신전이다. 석벽은 매우 정밀하게 축조되어 있었다. 이 신전을 건설하기 위해서 잉카인들은 마름돌(ashlar masonary)을 벽돌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마름돌이란 돌을 비슷한 크기의 입방체로 만든 것이다. 사진에서도 비슷한 크기와 모양의 돌이 정밀하게 쌓여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매우 많은 노동력을 동원해야 했다. 잉카 제국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잉카 제국의 황제들은 이 신전에 예식을 위해서 신탁과 구조물, 그리고 금박, 금과 은 항아리를 희사했다. 신전의 벽은 금박으로 뒤덮였고, 주위에는 금으로 만든 상이 즐비했다고 한다. 피사로가 쿠스코를 점령했을 때 이 신전의 벽과 제단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533년에 스페인으로 가져간 막대한 양의 금은 거의 모두 이 곳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잉카 제국의 몰락을 생각하면서 수도원의 정원과 쿠스코 시내를 잠시 내려다 보았다. 이 정원은 18개의 황금 상이 서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투어 참가자들은 버스를 타고 삭사이와만으로 이동했다. 쿠스코 북쪽 외곽에 있는 성벽이자 요새이며 사원이기도 하다. 15세기에 잉카제국이 건설했다고 한다. 잉카인들은 쿠스코를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퓨마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퓨마의 머리 부분에 삭사이와만을 만들었다. 1983년에 쿠스코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곳은 해발 3,700여m로 시내보다 더 높았다. 입구에 나무로 된 문이 있었다.

아르마스 광장의 잉카 제국 기념 분수의 주인공 같아 보이는 사람의 그림이 보였다. 잉카 제국의 14대 왕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잔디밭 너머로 돌로 쌓은 높은 성벽이 보였다. 3개 층의 테라스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의 성벽은 직선이 아니라 지그재그 모양으로 이어져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엄청난 크기의 바위들이다. 하나의 무게가 120톤을 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정교하게 짜 맞춰져 있었다. 매우 강한 지진이 발생해도 견딜 정도라고 한다. 잉카인들의 석조술과 운반 능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스페인 사람들은 쿠스코에 건물을 지으면서 이 곳의 돌을 가져갔다고 하다. 가져가기 어려운 큰 돌들이 주로 남아있는 셈이다.

주차장으로 오는 길에는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이 줄지어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삭사이와만은 요새이기는 했지만 스페인 사람들의 침입 전에는 외부의 침략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평소에는 오히려 태양신을 위한 신전과 잉카 기념 행사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기고와 귀중품을 보관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피사로가 1532년 잉카의 왕을 죽이고 쿠스코를 점령했을 때, 잉카의 군대는 삭사이와만을 근거로 저항했다. 피사로는 동생 후안을 보내서 이 요새를 점령하였다. 그 과정에서 동생은 전사했지만 잉카의 저항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요새 내에는 탐보마차이라는 샘이 있었다. 잉카 사람들이 이 곳에서 목욕을 한다고 했다. 

자연 동굴도 있었다.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삭사이와만에서는 쿠스코 시내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제법 큰 도시였다. 중앙에 아르마스 광장이 보였다. 

쿠스코 시내를 내려다 보고 있는 예수상도 있었다. 날이 흐리고 저녁 시간이 다가와서 조명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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