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5
그동안 날씨가 참 좋았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지붕 위로 바람이 부는 소리가 거칠다. 8시에 마운틴쿡 빙하 탐사 보트를 예약했었다. 계곡을 따라 흘러 내려온 빙하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는 활동이다. 보트를 타고 호수에 떠 있는 빙하 가까이 접근하여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다. 서둘러 허미티지 호텔에 있는 접수대로 이동했다. 그런데 날씨가 좋지 않아서 우리 일정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이후 일정도 어떻게 될지 아직 알 수 없다고 했다.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담당자는 무료로 에드문드 힐러리 경 센터와 박물관 티켓을 주었다. 갈 곳도 없고 궁금하기도 해서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힐러리 경은 1953년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처음으로 정복한 산악인으로 유명하다. 전에는 그가 뉴질랜드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지 못했다. 당시 그는 9번째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일원이었다. 그가 영국 원정대에 속했던 것은 뉴질랜드와 영국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다. 뉴질랜드는 1947년에 독립을 했지만 영연방 국가로서 영국과 긴밀한 관계였다. 1950년 한국전쟁에도 5000여명을 파병하였는데 영국 연방의 이름으로 참여했을 정도이다.
안 쪽에 있는 홀에서 힐러리 경의 일생에 대한 동영상을 상영하고 있었다. 힐러리 경과 마운틴 쿡과의 인연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이 곳에서 등산가로서 여정을 시작했다. 1947년 그는 뉴질랜드 최고봉인 아오라키-마운틴 쿡 등정에 성공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신체적 능력을 감안한 등산 기술을 연마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등산가로서 성장한 곳이여서 이 센터가 여기에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내 관심을 끈 것은 1958년에 그가 영연방 남극 원정 탐험대의 일원으로 남극점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는 탐험대 내의 뉴질랜드팀의 리더였다. 뉴질랜드 팀은 아래 사진에 있는 것과 같은 트렉터를 개조한 차 3대를 이용해서 가장 먼저 남극점에 도달했다. 이 개조한 트랙터는 남극의 부드러운 눈과 크레바스를 통과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트랙터의 운전석은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천막으로 막았다. 뉴질랜드 팀원들은 컨버터블 차를 타고 남극대륙을 횡단했다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힐러리 경의 남극점 도달은 1911년 아문젠, 1912년 스코트 이후 최초였다. 더구나 차량으로 남극을 방문한 것 역시 최초였다. 영연방 탐험대장이었던 푹스(Fuchs)와 탐험대의 허락을 얻지 않고 행동했다는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힐러리 경의 성공 때문에 큰 문제가 비화되지는 않았다. 그는 또 다시 뉴질랜드의 영웅이 되었다. 박애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셀파를 돕는 히말라야 트러스트를 설립하고 주도했으며, 히말라야 오지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일에도 헌신했다. 자기 일에는 용감하고, 타인에게는 자애로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3D극장에서는 마운틴 쿡의 모습을 삼차원으로 보여주었다. 눈으로 덮힌 높은 산을 직접 올라갈 수는 없었지만 이 영상으로 마운틴 쿡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즐길 수 있었다. 밖을 보니 비가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움직일 시간이다.
차를 타고 후커밸리 로드를 따라 계곡 안쪽으로 이동했다. 화이트 호스 힐 캠프 그라운드가 나왔다. 이 곳에 후커밸리 트랙 입구가 있다. 이 트랙은 왕복 3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트랙을 걷기 시작했다. 경사도 심하지 않고 바닥에는 잔 자갈이 깔려 있어서 걷기 좋았다.
트랙 입구에 들어서자 왼쪽으로 아오라키-마운틴 쿡이 보였다. 산의 절반 정도는 빙하로 덮여 있었다. 최정상 부분은 구름에 살짝 덮혀 있다. 장엄한 모습이다. 파란 하늘이 배경이었으면 더 멋질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조금 걸어 들어가니 전망대가 나왔다. 황량하면서도 대단한 경치이다. 밝은 옥색 호수가 보였다. 뮐러 빙하호이다. 파란 물감에 우유를 많이 탄 것같다. 아마 빙하와 가까와서 빙하에 의해 아주 잘게 부서진 암석 알갱이가 많이 들어 있는 탓인가보다. 일본에서 온 젊은이들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첫번째 현수교가 보였다. 후커강을 건너는 다리이다. 안전을 위해서 건너는 사람의 수를 20명 이내로 제한한다고 적혀있었다. 강풍, 폭우 예보가 있으면 이 다리 입구를 폐쇄한다고 한다.
길고 긴 U자곡을 따라 트랙은 구불구불 계속 이어졌다. 잠깐이나마 파란 하늘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국 단체 관광객들도 만났다.
계곡 옆에는 U자곡 답게 급경사를 이룬 사면이 이어졌다. 심한 경사 때문에 작은 암석이 흘러 내린 모습도 보였다.
어떤 곳에서는 후커 강이 V자곡을 만들고 있었다. 빙하 녹은 물이 세차게 흘렀다.
호수가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섞여서 겹겹이 쌓여있는 퇴적물이 보였다. 전형적인 빙하 퇴적물 틸(till)이다. 빙하가 녹으면서 운반해온 자갈과 모래를 쌓아놓게 된 것이다.
트랙은 계곡 안 쪽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다시 하늘에는 먹구름이 끼고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트랙 옆 사면에는 작은 계곡들을 따라 많은 작은 폭포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트랙은 계속 이어졌다. 빙하로 덮힌 계곡이 점점 가까워 지고 있었다.
바람은 이제 아주 강해졌다. 데크로 만든 길이 나왔다. 걷기 좋았다. 그런데 강풍에 밀려서 데크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바람 속을 뚫고 걷는 것이 이렇게 힘든줄 몰랐다. 몸을 앞으로 웅크리고 걸었다. 여기까지 유모차를 끌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강풍에 유모차가 크게 흔들려 안에 있던 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마침내 트랙의 끝인 후커 호수에 도착했다. 강풍이 매우 세게 불어서 서있기도 힘들었다. 다리를 크게 벌리고 온 몸에 힘을 주고서서 겨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후커 밸리는 날씨가 수시로 바뀐다고 한다. 강풍 때문에 캠퍼밴이 바람에 넘어지는 사고도 종종 일어난다고 한다.
후커 호수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보았다. 호수 끝에 빙하가 옥색으로 보였다. 빙하의 끝단이다.
호수까지 내려온 빙하의 모습을 확대시켜 보았다. 빙하의 옆면이 선명하게 보였다. 윗부분은 바람에 날려온 것으로 보이는 흙으로 덮여 있었다.
호수 위에 괴이한 모양의 바위가 보였다. 짐승의 모습 같기도 했다. 줌업을 해보니 유빙이었다. 물 위로 보이는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다.
이제 돌아가기로 했다. 몇 발자국을 걸었는데 갑자기 매우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를 비롯해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넘어졌다. 건미는 바위 쪽으로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서 건미에서 다가갔다. 건미는 넘어지면서 바위를 손으로 짚다가 손 바닥 일부가 벗겨졌다. 강풍에 몸이 들려서 옆에 있는 바위에 머리를 부딪쳤다고 한다. 우리는 당황해서 어쩔줄 몰랐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밴드를 비롯해서 응급처치 용품을 가져다 주었다. 어떤 분은 건미의 눈을 점검하면서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 주었다. 아마 의사인 것 같았다. 도움을 준 사람들이 고마웠다. 그리고 응급조치를 위한 세트를 반드시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바람은 계속 강하게 불었다. 내려오는 길이 아주 멀게 느껴졌다. 한 참을 걸려서 트랙 입구 쪽에 다달으니 바람이 약해졌다. 무사히 내려와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숙소 프론트에 가서 의료 지원 여부를 확인했다. 이 곳에는 의료진이 없으며, 자동차로 40분 이상을 나가야 병원이 있다고 했다. 병원 전화번호를 받아서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 둘은 너무 힘들고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을 자고 나니 저녁이 되었다. 창 밖으로 아오라키-마운틴 쿡의 정상이 보였다. 여전히 먹구름이 산을 뒤덮고 있었고 바람은 여전히 거셌다.
이 지역에서 강풍이 부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U자곡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깊고 넓은 U자곡은 장애물이 없어서 공기가 이동하기 좋은 지형이다. 또한 주변에서 바람이 불어와서 이 큰 산을 만나면 U자곡은 마치 깔대기처럼 공기가 모여서 지나는 통로가 된다. 그래서 강풍이 불게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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