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30
06:30에 용인 수지에서 출발했다. 목적지는 보길도이다. 해남 땅끝에 있는 갈두항에서 배를 탈 예정이다. 섬은 대중교통이 불편할 것 같아서 차를 가져간다. 카페리는 현장 발권만 해서 예약을 할 수 없었다. 많이 붐비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교대로 운전하니 5시간 만에 갈두항에 도착했다. 배편은 30분 간격으로 있다. 대기 승객도 많지 않다. 땅끝마을에 있는 평점이 좋은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전복해물탕은 가격(4만5천원)에 비해서 음식이 부실하게 느껴졌다. 여객선터미널로 가서 승선권을 구입했다. 성인 6500원, 차량은 18,000원이다.
13시 배편에 차를 실었다. 평일인 탓인지 승객도 건너가는 차도 많지 않다. 배는 천천히 갈두항을 빠져나갔다. 섬에 갈 때는 언제나 마음이 설레인다. 바다를 건너야 갈 수 있는 곳, 미지의 공간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날씨는 쾌청하고 바다는 잔잔했다.
왼쪽에 보이는 해안의 작은 봉우리 위에 땅끝전망대가 우뚝 서있다. 땅끝은 끝이기도 하지만 바다라는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는 곳이다.
뱃머리쪽 태극기 아래에서 모두 사진을 찍었다. 우리도 기록을 남겼다. 스위스 여행을 할 때 사람들이 스위스 국기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도해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섬과 섬 사이의 바다는 거의 모두 가두리 전복 양식장이다. 배는 양식장 사이로 겨우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30분 정도 걸려서 노화도 산양진 선착장에 닿았다. 노화도와 보길도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두 섬은 행정구역이 전복으로 유명한 완도군이다. 완도 전복의 본고장이 노화도라고 한다. 싱싱한 전복을 맛볼 좋은 기회이다. 판매처(완도참전복)를 찾아서 전화로 주문했다. 마침 전복 가격이 30% 내렸다고 한다. 보길도 숙소까지 배달해주기로 했다. 노화도를 가로 질러 보길도로 들어섰다. 내일은 비예보가 있다. 오늘 보길도 윤선도 원림을 돌아보기로 했다. 대한민국 명승 제 34호로 지정된 곳이다. 원림(園林)은 울타리 안에 과수를 심은 동산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까지 널리 사용된 용어이다. 정원(庭園)은 담장 안의 뜰을 부르던 이름이다. 한편 궁궐 안에 있는 식물과 동물을 기르는 뜰은 정원(庭苑)이라고 했다. 한글 표기는 같지만 다른 한자를 사용했다. 보길도 가운데 쯤 있는 낙서재 주차장에 도착했다. 윤선도의 살림집인 낙서재와 곡수당, 학문과 휴식을 위한 공간인 동천석실이 있다. 지도를 보니 동천석실이 가까워보여서 먼저 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 지도는 믿을만하지 않았다.
동천석실로 가는 길은 동백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전성기는 지났지만 두툼한 붉은 색 낙화가 여전히 싱싱하고 탐스러웠다. 세번 진다는 동백꽃이다. 나무에서는 졌지만, 땅에서, 그리고 우리 마음에서는 아직 지지 않았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석교를 건너자 숲으로 접어들었다.
살짝 오르막인 숲속 길은 쾌적했다.
호흡이 많이 가빠질 무렵 날렵한 한칸 한옥이 눈에 들어왔다. 경사가 심한 산 중턱 바위 많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집이 있을만한 곳이 아니다.
침실이다. 낮에는 동천석실에서 지낸 윤선도가 밤에 잠을 자던 곳이다. 온돌 바닥이다. 한 칸 크기여서 최소한의 공간으로 느껴졌다.
침실에서 20여m 위에 동천석실이 있다. 역시 사방 한칸 한옥이다. 동천(洞天)은 도교의 동천복지(洞天福地)에서 따온 말이다. 산수가 빼어나게 수려해서 신선들이 산다는 곳이다. 유학자들은 여기에 학문과 수양을 위한 은둔적 공간이라는 뜻을 더했다. 석실은 돌로 만든 방이다. 그런데 동천석실은 목조 건물이다. 바위 위에 있는 은둔 공간으로 이해하면 될까? 고산은 철저하게 분리된 자신만의 공간을 원했던 것 같았다. 강직한 성품과 타협을 모르는 그는 불의를 보면 상소했다가 자주 파직과 유배를 당했다. 관직 재직 기간은 10년 남짓이고, 유배 기간은 15년 정도라고 한다. 이로 인한 심신의 상처 회복을 위한 그만의 동굴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동천석실 내부는 나무 마루였다. 천장의 서까래도 노출되어 있다. 창문을 열면 부용리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을 것이다.
동천석실 앞에서 부황리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고산이 살았던 낙서재와 곡수당도 잘 보였다. 고산은 신선처럼 마을을 내려다 보았을 것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고산은 의병을 모집하여 배에 태우고 인조가 피신했던 강화도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인조는 강화도를 떠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결국 1637년 청나라에 항복했다. 당시 51세였던 고산은 크게 낙심하여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제주도로 떠났다. 가던 중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정박하고, 마음에 들어서 정착하게 되었다. 윤선도는 이 곳의 지형이 산으로 둥그렇게 둘러싸여 마치 피어나는 연꽃 같다고 해서 부용동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보길도는 크지 않은 섬이지만 이 곳은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윤선도가 좋아했다고 한다. 바다가 1차로 격리해주고, 산이 다시 막아주는 은둔과 안빈의 입지이다.
마침 해설사를 하셨다는 마을 주민을 만났다. 윤선도가 차를 끓여 마시던 차바위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셨다. 바위는 비교적 편평했다. 바위 위에는 차상다리를 고정하기 위한 구멍과 낙서재 주변 지형과 비슷한 제법 커다란 홈을 만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산은 이 곳에서 차를 마시며 다도를 즐기고, 시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차바위 옆에는 용두바위도 있었다. 이 바위 사이의 틈에 도르래를 설치해서 음식을 운반해서 먹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마을까지 줄을 연결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차바위 아래에 작은 연못이 보였다. 흙과 암석을 파내어 만든 곳이다. 연못에는 연꽃도 심었다고 한다. 희황교라는 이름의 작은 돌다리도 있다. 희황은 중국의 황제 복희씨를 지칭하는 것으로, 동천석실을 황제가 사는 곳으로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 상나라의 조상신 또는 전설상의 제왕인 복희씨는 세계의 실질적인 시조라고 할 수 있는데, 다양한 신격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는 '인간을 동물로부터 격상시킨 문화의 창시자'가 포함된다. 시조를 사랑한 고산이 다리 이름으로 선택한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윤선도는 이 연못의 물로 씻기도 했다고 한다.
동천석실을 내려오면서 고산이 85세까지 장수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운동이 되었다. 동백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길을 따라 낙서재를 보러 갔다.
길 왼쪽으로 유채꽃밭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곡수당 건물들이 보였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모퉁이를 돌자 낙서재 전경이 나타났다. 격자봉(해발 433m) 아래에 있는 보길도에서 가장 좋은 위치라고 한다. 윤선도는 당대의 풍수지리 최고 전문가였다. 효종의 능을 선정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보길도의 구석구석을 답사하면서 입지를 정했을 것이다. 북쪽은 계곡으로 열려있고, 동남서 방향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곳이 주택지로서 좋을지 의문이 들었다. 겨울에 몰아치는 차가운 북서풍을 막기 어려울 것 같았다. 입구에 사방 한칸 한옥 건물, 동와가 있고, 그 뒤에 사당과 전사청이 보였다. 사당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전사청은 제사에 올릴 음식 장만과 제사에 필요한 도구를 보관하던 곳이다. 낙서재는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낙서재는 단아한 기와 한옥이다. 처음에는 모옥이었다. 모옥은 띠나 이엉 따위로 지붕을 만든 집이다. 후손들이 기와집으로 바꾸었다. 윤선도는 51세인 1637년에 처음 이 곳에 들어왔다. 1년 정도 살다가 관직을 맡거나 유배를 가는 바람에 81세가 되어서 다시 돌아왔다. 이 곳에서 독서도 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낙서재는 북향집이다. 항상 왕이 있는 한양을 바라본다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큰 벌이 감해졌다는 말도 들었다.
낙서재 마당 바로 앞에는 귀암이 있다. 바위를 쪼아 거북이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2011년에 발견했다. 고산유고 귀암 시편에 나오는 4령 중 하나이다. 고산이 달맞이하던 장소로 기록되어 있다. 달은 윤선도의 다섯 친구(오우) 중 하나이다. 달맞이는 그가 즐기던 풍류의 한 가지였다고 한다. 어두운 한 밤 중에도 만물을 밝게 비추는 벗이다. 귀암 덕분에 낙서재 원형 복원에 도움이 되었다. 귀암 건너편 산 중턱에 동천석실이 보였다.
낙서재 뒤 경사면에는 고산이 소은병이라고 명명한 바위가 있다. 소은병은 주자가 경영한 중국 복건성 무이산의 대은봉 건너편에 있는 봉우리 이름이라고 한다. 산속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했던 주자를 모범으로 삼는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소은병과 낙서재, 귀암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었던 모양이다.
낙서재를 돌아보고 곡수당으로 향했다. 낙서재에서 200여m 떨어진 개울 가까운 곳이다. 고산의 5남 학관의 처소였다. 먼저 고산이 제자를 가르친 서재가 보였다. 서재로 가는 일삼교라는 돌다리를 건넜다. 학관이 하루 세번 아버지 고산에게 문안 인사 드리러 건너던 다리라고 한다.
서재 마루에 걸터앉아서 건너편 곡수당을 바라보았다. 제법 높은 돌축대 위에 서 있는 건물은 상연지 그리고 두개의 다리와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곡수당 쪽으로 걸었다. 먼저 원형 돌확 수조를 만났다. 동백꽃이 채우고 있다. 나무로 만든 물길로 계곡의 물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 물은 상연지로 떨어진다.
상연지와 곡수당의 측면 모습이다. 상연지 바닥에는 특이한 모양의 큰 돌들이 놓여 있다. 물에 잠기면 멋진 섬처럼 보일 것이다. 한 쪽 벽에는 깊은 홈이 있어서 수면이 높아지면 빠져나가도록 해 놓은 것 같았다. 한편 상연지는 제법 깊어서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빠지지 않으려면 걸음을 조심해야 한다. 선비는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라는 뜻이었을까?
곡수당 정면의 모습이다. 아담하지만 품위있는 건물이다. 곡수당은 계곡물이 굽이쳐흐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오후 햇볕도 잘든다. 남서향이다.
곡수당 앞 개울 건너 편에 제법 커다란 정사각형 모양 하연지가 복원되어 있었다. 풍수학에 따르면 연못은 땅의 기운을 보완하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조선의 궁궐이나 종묘에 있는 연못은 사각형이고 가운데 작은 둥근 섬이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동양의 우주관,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나타낸 것이다.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이 반영된 것이다. 이 곳에는 네모진 연못만 있었다.
윤선도원림의 윗부분을 돌아보고 세연정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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